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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김남주 목사 (5) 중학 시절도 ‘원생’ 꼬리표… 성적 60명 중 58등

김명순 | 2015.07.05 00:22 | 조회 4445

[역경의 열매] 김남주 (5) 중학 시절도 ‘원생’ 꼬리표… 성적 60명 중 58등

어머니, 외가동네서 밭일 해주며 생활… 아버지와 합류 후 산자락에 토담집을

입력 2015-07-03 00:42


                                 
                
[역경의 열매] 김남주 (5) 중학 시절도 ‘원생’ 꼬리표… 성적 60명 중 58등 기사의 사진                
김남주 총장은 1980년대 중반 대전에서 목회를 할 때 어린 시절 지냈던 고아원을 다시 찾아갔다. 뒷줄 정장 차림의 남자가 김 총장이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다닌 강진중학교는 강진농고와 같은 교정에 있었는데, 넓은 동산에 잘 가꿔진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탱자나무 울타리, 벚꽃나무, 시누대 등 각종 수목들이 가득 차 있었다. 논농사 실습장, 클로렐라 실험실, 버섯 재배실, 젖소 사육장, 뽕나무 재배장 등도 있어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 원생들은 어디를 가나 ‘고아원 아이들(새끼들)’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사고도 많이 쳐서 고아원 사무장님은 늘 골치를 앓았다. 나도 학교 공부는 제쳐놓고 구두닦이와 극장보이를 하는 원생들과 어울렸다. 시비와 싸움에 맛이 든 나는 군인 탄띠를 구해 가슴에 차고 다녔다. 그럼 싸우다 가슴골을 맞아도 괜찮았다. 작은 군인벨트도 구해 31개의 구멍을 내고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배지를 뿔이 되도록 달아 싸움 도구로 썼다. 허리 양쪽에는 송곳과 잭나이프도 찼다. 가죽장갑을 잘라 손가락을 내고 해골반지까지 구해 ‘한 놈 걸리기만 해봐라’ 하면서 시비를 걸러 돌아다녔다  

학교에 가기 싫으면 구두닦이 통을 메고 읍내를 돌았다. 친구가 “구두 딱∼” 하면 나는 “딱딱∼” 하면서 길 가던 어른들을 가로막고 구두를 닦으라고 했다. “이놈들이∼” 하면 나는 “뭐? 이놈?” 하면서 대들고 한방을 치고 도망가곤 했다. 한번은 다른 고아원에서 옮겨 온 원생과 시비가 붙었다. 각목에 맞아 쓰러진 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그런데 양쪽 엉덩이가 부어오르고 위아래 앞니 5개가 부러지고 없었다. 돈이 없어 치과에 가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신학생 때까지 이빨이 5개나 빠진 채로 그냥 지냈다. 

당시 한 학급 학생수가 60명이었는데 나는 58등을 했다. 그래도 내 뒤에 두 명이나 있다는 것에 위로를 삼고는 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IQ검사에서도 나는 96이 나왔다. 공부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키도 전교에서 제일 작았다. 전교생 체조나 교장선생님 훈시 등으로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할 때면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김남주, 기준∼”이라고 했고 나는 오른팔을 들어 “기준”을 외쳤다. 반에서 자리도 제일 앞 1번 책상이었다. 뒤에서 떠들 때 인상을 쓴 채 돌아보며 “조용히 안 해!”라고 하면 다들 조용해졌다. 키는 작아도 힘이 약하진 않았다. 고아원에서 형들에게 배우고 서로 가르쳐 주면서 태권도 복싱 유도 평행봉 배구 정권지르기 등을 많이 연습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고아원생들은 아침부터 농장에 가서 일을 했다. 학생들도 방과 후에 농장에 가서 일하곤 했는데, 어린 나이에 불평을 하면서도 다들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방학 때면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다녀올 수 있었다. 친정 동네로 간 어머니는 남의 초가집 한 구석 한 평 정도의 작은 방을 얻어 살았다. 집 한 칸, 땅 한 평 없던 어머니는 남의 밭에서 고구마를 캐주고 얻어온 것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외갓집 동네였으나 다들 넉넉하지 못해 그냥 불쌍히 여길 뿐, 도와주지는 못했다.

몇 년 후 머슴살이 갔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합류했다. 동네 어르신에게 산자락의 쓸모없는 땅을 빌려 흙담집을 지었다. 냇가에서 자갈을 주워오고 볏짚과 흙을 이겨서 두껍게 담을 올린 뒤 그 위에 나뭇가지들을 올려 짚으로 덮었다. 그곳은 동네 사람들이 죽으면 메고 가는 상여를 보관하는, 흔히 말하는 귀신 나오는 곳이었다. 해변이라 버린 굴 껍질도 쌓아 놓아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계속 고아원에서 생활했다. 방학 때마다 집에 가면 아버지가 정말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조금씩 거들었다. 그러면서 동생들도 생기고 커나갔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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