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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에 찔려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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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봉호
댓글 0건 조회 2,551회 작성일 22-04-0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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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정혜신 박사의당신이 옳다에서 나오는 글이다. 이 책은 공감 능력이 없이 말하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즉 충조평판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사랑했다. 욥의 고통에 동정하며 아파했다. 그러나 욥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바른말을 한답시고 충조평판을 했다. 그들의 충조평판은 욥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

 

세 친구 한 사람인 소발의 경우를 살펴보자. 소발의 말은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없이 바른 말이다. 그런데 욥은 소발의 말에 반발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다. 욥이 원했던 것은 바른말 이름으로 행해진 충조평판이 아니다. 자신의 곁에서 위로와 공감을 원했다.

 

우리가 쉽게 하는 실수가 여기에 있다. 우리도 바른말을 할 때가 참 많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동기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바른말에도 경우와 때가 있다. 경우와 때가 맞아야 영향력이 있다. 바른말이 상처를 치유하는 반창고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소금을 붓는 결과일 수도 있다.

 

공감을 영어로 표현하면 ‘Sympathy’‘Empathy’ 2가지가 있다, 2가지 단어 모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느끼며 도우려는 감정이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Sympathy는 동정이나 연민에 가까운 공감이다. 상대적으로 머리로 이해하는 이성적인 기제다. 반면 Empathy는 감정이 이입되는 것이다. 미안함이나 안쓰러운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상대방이 처한 현실로 들어가 보려는 실체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욥이 소발과 친구들에게 원하는 공감은 Empathy이다.


사람은 바른말로 변하지 않는다. 바른말 이전에 공감이다. 공감으로 소통되어야 바른말이 치유와 변화를 일으킨다. 정혜신 박사는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친구들은 욥에게 사랑의 이름으로마음에 폭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한다. 충조평판이 시작되는 순간 소통은 불통으로 바뀐다. 상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문고리가 열리지 않도록 굳게 문을 걸어 잠근다. 불통이 또 다른 고통으로 이어진다.

 

우리 시대는 공감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한가지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시며 온전히 공감해 주신 것이다. 또한 그렇게 공감해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주시고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정 공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공감하는 삶을 살 때, 치유와 코이노니아가 일어난다. 바른말로 상대의 마음을 찔러 죽이는 일이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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